줄거리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그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겪은 삶과 학문,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려낸 영화다. 영화는 정약전이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인해 유배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당시 정약전은 형 정약용과 함께 조선 지식인 계층에서 개혁적 사고를 지닌 인물로, 외세와 신교, 그리고 백성을 향한 관심으로 인해 정통 유학 사회에서 배척을 받게 된다. 흑산도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유배 생활을 이어가려 하지만, 섬 주민들과의 관계를 통해 점차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지적 호기심이 넘치는 천민 출신의 청년 창대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학문과 지식을 매개로 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며 창대와 함께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 그 속에 담긴 조선 후기 신분제의 한계, 지식의 공유와 실천적 학문의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또한 섬사람들의 삶과 그들을 향한 정약전의 애정, 시대를 거슬러 진정한 학문이 무엇인지를 묻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흑백의 영상미를 통해 조선 후기의 질감과 사유를 담백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니라, 지식과 인간성, 그리고 사회적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역사적 배경
〈자산어보〉는 실존 인물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생애 후반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정약전은 조선 후기 실학의 중요한 인물이자, 남인 가문 출신으로서 정약용의 형이다. 그는 천주교 신봉자였고, 이러한 신념과 사상으로 인해 신유박해(1801년) 당시 정치적 종교적 탄압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된다. 흑산도는 조선 시대에도 육지에서 먼 외딴섬으로, 반역죄나 사상범 등이 보내지는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정약전은 이 유배 생활을 비극으로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섬 주민들과 교류하고 바다 생물을 관찰하는 학문적 탐구의 시간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이곳에서 천민 출신의 어부들과 교류하며, 수산 생물에 대한 정보와 민간지식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산어보』라는 해양백과사전을 집필했다. 이 책은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도감으로 평가받으며, 조선 후기 실학의 상징적 결과물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와 유교 이념에 기초해 있었지만, 정약전은 실용과 인간 중심의 사고를 통해 그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창대는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정약전이 당대 하층민들과 실제로 학문적으로 교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자산어보〉는 단순히 한 유배인의 일대기를 넘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조우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문서이며, 실용학문과 민중과의 연계를 강조한 실학사상의 구현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학문과 인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실천적 지식인의 표본으로 재조명한다.
감상평
〈자산어보〉는 단순한 역사극이나 위인전이 아닌, 시대와 인간, 학문과 실천의 본질을 고요하게 사유하는 영화다. 감독 이준익은 특유의 흑백 촬영 기법을 통해 조선 후기의 풍경을 담담하면서도 철학적으로 그려냈고, 이는 관객에게 시각적인 집중과 정서적 몰입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영화의 미덕은 ‘정약전’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그의 위대함이나 업적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고뇌와 인간적인 모습까지 섬세하게 포착한 데 있다. 배우 설경구는 절제된 연기로 지식인으로서의 품격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동시에 표현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변요한이 연기한 ‘창대’ 역시 지식에 대한 열망과 신분적 한계를 넘으려는 젊은 세대의 갈망을 담아내며, 두 인물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 관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연결을 그려낸다. 이 영화는 조선 후기라는 배경이 가지는 정치적 억압과 제도적 경직성을 넘어, 인간 본연의 가치와 학문의 의미,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학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지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성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극적인 사건이나 자극적인 연출 없이도 오직 대화, 침묵, 풍경, 그리고 시선만으로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이 작품은 느리지만 묵직하게 남는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 〈자산어보〉는 조선의 먼바다에서 시작된 진정한 배움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가치를 전한다.